신해혁명 원훈, 무창봉기 발기인 장진무


장진무

 

혁명지사 장진무는 십언시 죽산현에서 태여나 죽산현고등학당을 졸업한후 선후로 호북성사범학교, 일본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깊이 연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길을 찾는 동시에 함께 전진기법을 련습하였다.1907년, 장진무는 동맹회에 가입하여 련락사업에 취임하고 같은 해에 귀국하여 무창 황학루가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소학교를 교편을 잡는 기간에 그는 사회활동을 적극 전개하여 연설회, 체육회, 공립학당을 꾸리고 혁명정신을 강연하고 혁명동지들과 련락하여 무창봉기의 조기혁명을 위해 관건적인 포석을 닦아놓았다.

또 2년후 혁명당원들의 추세가 점차 커지자 장진무는 공진회에 흡수되여 손무를 협조하여 악성총부를 건립하였는데 그사이 판매자가 되여 혁명경비를 생산하고 충전하였다.1911년, 무창 수의의 별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수의는 호북문학사와 일찍 재일중국인들이 조직한 공진회를 주요지도단체로 하여"한실을 흥복시키고 우리 강산을 환원하며 몸소 나라를 허하고 공을 세워 물러나자"는 그들의 공동지향이다.

당시 청정이"로드보호운동"을 진압하고 호북성 청군이 사천을 조방하고 3진이 공허하여 거의를 한시도 늦출수 없게 되자 장진무는 즉시 동지들과 련락하여 거사를 하였다.

무창이 수의한후 장진무는 시종 북양독재를 반대하고 2차혁명을 준비하며 다른 북벌군을 조직하고 려에 가서 따로 세우는 태도를 견지하였다.각종 모순투쟁의 소용돌이에 처해있는 장진무는 원세개에 의해 두번째로 상경하게 되였다.결국 베이징 6개국 호텔에서 연회를 베풀어 유인하여 살해되었다.

 

장진무

 

1912년 9월초, 장진무의 영구는 북경에서 십언죽산으로 운송되였다. 죽산백성들은 그를 위해 성대한 추모대회를 거행하고 추모3일후 수천명의 호송하에 령구를 성북 관음구 목어산에 매장하였다.

이 수의공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죽산현정부는 1982년에 장진무의 무덤을 새롭게 보수하고 2001년에 죽산사범부속소학교를 장진무소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그후 또 성당위, 성정부의 지지를 거쳐 장진무의 묘지를 중수하였는데 묘비에는"신해혁명의 수의선열 장진무선생의 묘"가 씌여져있다.1983년 12월에 현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