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 정치가, 초대 양무치-원걸


원걸

 

양초대 순무-원걸은 양부와 양무치의 창시자로서 전체 십언력사의 발전에 대해 모두"초대가 시작되고 혼란을 다스리는"불세출의 공을 세웠다.

원걸, 자자영, 산서 택주 양성출신.원걸이 정치에 입문하는 기간에 그는 사람됨이 정직하고 공정하며 처사가 과단성있게 결단되여 남경어사로부터 강서를 순시하고 순천부를 순시하던데로부터 강서사찰에 이르렀다.국정을 잘 다스리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으로 여야에 유명하여 명헌종 주의 깊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양양은 명나라 성화 12년 (1476년) 에 건설되기 시작하였는데, 일찍이 명청 시기에 유민 문제에 대해 설립한"특구"이었다.당시 형양산구 유민들이 모여 폭동이 빈발하자 조정은 두 차례 파병하여 진압했지만 이곳에 모인 유민들은 다시 모였다.그리하여 명헌종은 원걸을 임명하고 도찰원 좌부부어사의 직책으로 형양으로 가서 그로 하여금 윤양을 다스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였다.

양양에 온후 원걸은 민생을 탐사하기 위해 모든 군현을 답사하여 깊은 산과 준령에 발자취를 남겼다.그는 조정에 상세한 상황을 상소하여"유민소 처리"를 썼다.유민들이 고향을 떠난 근본 원인은 가혹한 잡세가 과중하고 토지 합병 등의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와 동시에 원걸은 백성을 위해 명령을 청하고 조정에 백성들의 조세부역을 경감해줄것을 청구하면서 토지와 부역을 나누어 배치하는것이야말로 류민들의 근본을 다스리는 방책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무적의 유민을 등록하고, 유민 부적 정책을 선전하며, 빈 토지를 부적 유민에게 나누어 경작하게 한다.관리와 백성을 거느리고 대규모로 토지를 개조하고 댐을 건설하는 등 수리공사.농업기초시설을 건설하고 벼, 수맥의 재배면적을 보급하여 백성들의 식사문제를 해결하였다.한강 제방을 축조하여 홍수를 막고 백성들을 위해 수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유민들의 장기적인 안정에 근본적인 역할을 발휘했다.

 

원걸

 

이밖에 그는 또 류민을 무치하는데 유리한 다성역행정구획을 설계하고 양부를 증설하고 양무대, 이호광행도사를 양지에 주둔시켰다.영양을 악예천과 섬서성이 인접한 지역의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지역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바로 원 제차납민정과 민의를 체득하는 관리하에 40여만명의 류민들이 각기 제자리를 찾아 대국을 확고히 하고 서막을 열어놓았다.그제야 양부의 파란만장하고 휘황찬란한 500년의 력사를 썼다.